제목: 펌) 가을끝, 강원도 국도변을 헤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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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5-09-23 14:22
조회수: 5678


마흔에 길을나서다·12  
"가을끝, 강원도 국도변을 헤매다"  




날이 춥다. 어디 급한 데 출장을 가는 사람처럼 챙겨 입고 아침 8시 5분에 춘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평창행 버스를 탔다. 타는 사람이 딱 두 사람이다. 평창 시댁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아주머니와, 아무 볼 일도 없이 평창에 가는 나. 운전수가 투덜거린다.

“기름값도 안 나오는 길 가라니까 가야지 뭐.”

춘천에서 출발한 버스는 홍천터미널에 잠시 정차했다. 대합실 안에 민간인보다 군인들이 더 많다. 군인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홍천에서 딱 한 사람 탔다. 다시 버스는 출발했다. 세 사람 탄 버스 안이 지나치게 덥다. 운전수는 난방을 사정없이 틀어 놓고 트롯 메들리도 신나게 틀어댄다. 슬슬 잠이 쏟아지려고 하는데 횡성터미널이다. 홍천과는 달리 사람이 텅 빈 차부. 20분을 정차하겠다고 말해 놓고 운전수는 어디론가 휑하니 가버린다. 아침을 안 먹어서 배가 출출하다. 국밥집이라고 쓰여 있어 문을 열어보려고 했는데 잠겨 있다.

“거기 장사 안 한대요. 여기로 와요.”

나를 부른 사람은 신신서울상회 주인 최 노인이다. 최 노인의 가게에서 따뜻한 베지밀 한 병과 보름달 빵 하나를 샀다. 꼭 먹고 싶다는 것보다 어쩐지 그런 데서는 그런 음료에 그런 빵을 먹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연탄난로를 끼고 앉은 최 노인이 커피 들겠냐고 묻는다. 최 노인이 타주는 커피는 4백 원. 한 달 가게 세도 안 나와 올 겨울만 넘기면 최 노인은 가게 일 그만두고 원주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

“요새는 마트라는 게 생겨 가지고 장사 안 돼요. 자가용 타고 마트 가서 싣고 가면 그만인데, 이런 데 누가 옵니까.”

그는 하루 종일 연탄난로 끼고 앉아 오지 않는 손님 기다리며 ‘테레비’ 보는 것도 중노동이라고 했다.





참혹한 풍경에 닿을까 겁난다


횡성을 출발한 버스는 이제 장평, 대화, 평창을 거쳐 정선까지 간다. 내친김에 정선까지 갈까 하다가 평창에 그냥 내렸다. 정선을 가게 되면, 정선 밑 삼척까지도 가게 될 것이 나는 겁났다. 삼척에 가면 그곳, 삼척 노곡까지 가게 될 것이 나는 겁났다. 그곳에 가서 그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 겁났다. 내가 작년에 가서 보았던, 그 유정한 풍경 속에 살던 그들의 거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나는 지난 여름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정한 풍경 속의 사람들이 지금 겨울이 오는 이 길목에 컨테이너박스 집에 의탁하여 살고 있다는 것도. 참혹할 것이었다. 그것이 나는 겁났다.

서둘러 평창에 내려 맥없이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자니 그것도 좀 이상하여 대합실 안으로 들어갔다. 썰렁하다. 사람이 없으니 연탄난로 불이 꺼져 있어 나는 일없이 서성이며 간첩처럼 벽보판을 읽는다.

‘사원채용, 인원: ○명, 기간: 수시채용, 급여: 연월차 수당, 퇴직금, 학자금, 생리수당 포함 65만 원, 위치: 농공단지 내 ○○메디칼’
‘삼성카드가 1백만 원을 드립니다. 카드도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
‘화재는 인재’

대화, 장평, 진부, 미탄, 계촌, 영월, 하일, 지동, 마지, 주천, 조둔, 종부…. 마침 진부 가는 차가 있어 3천5백 원 주고 차표를 끊었다. 시동은 켜져 있고 시간도 지났는데 운전수는 오지 않는다. 차 안을 둘러보니 맨 노인들이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운전수가 ‘요지’로 이를 쑤시며 나타난다. 왜 늦었느냐고 내가 제법 사납게 물었다.

“라면 삶아 먹고 오느라 늦었지요.”
그는 넉살 좋게 웃는다.
“먹을라고 허는 것 먹어야지, 그럼.”

옆에 앉은 할머니가 운전수를 두둔한다. 단양 사는 온복순 할머니는 지금 대화에 사는 큰언니 구순 생일잔치에 가는 중이다. 아침에 밥을 해먹고 단양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어성천, 제천, 쌍용, 영월을 거쳐 평창까지 왔다. 밑도 끝도 없이 말한다.

“그전에 감자 캐루 계춘 갔댔지. 앞판대기, 뒤판대기, 호호호. 봉평 쪽으루 감자덜 캤대유?”
통로 건너 노인들한테 묻는다.
“뭘, 지끔은 양배차덜 거두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노인들의 농사짓는 공통의 화제로 차 안이 금방 훈훈해진다. 운전수가 내게 묻는다.

“여행 작가세요? 저기 뭐라든가, 기행문 쓰는. 이래 촌 빠쓰 타면 사람 사는 기 보이지요, 허허.”

그렇게 웃다가 느닷없이, “아이구, 저 도락꾸가 길을 막구서 처지랄을 하네.”
필시 소먹이용으로 쓰일 짚가리를 과적하여 탈이 생긴 트럭을 두고 하는 소리다.

화제는 자연 ‘끔’ 좋은 소 이야기로 바뀌었다.

“요새 한우 한 마리에 3백30만 원 한다데.”
“3백30이 다 뭐야, 3백35만 원이지. 요샌 개 키울 필요 하나도 없다구. 송아지래두 소를 키야지.”

이승복기념관이 휙 지나가고, 효석문화마을이 또 휙 지나간다. 강원도 국도변에 억새가 쓸쓸하다.


쓸쓸한 것, 고독한 것, 한 번 해보자


이번 달에는 그랬다. 전라도 말로 그 무슨 ‘새빠진’ 소리냐고, 누구한테 들을 것도 없이, 그 생각이 들 때, 내가 나한테 그랬다. 그런데도 굳이 해보고 싶었다. 그 생각, 그것이란 다름 아닌 ‘쓸쓸한 것’이었다. 누구는 배꼽을 잡고 웃을지 모르지만, 정말 그랬다. 그것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것, 그 쓸쓸한 것. 고독한 것, 외로운 것, 슬픈 것. 그래서 이튿날 진부에서부터 동행을 한 사진기자 박여선에게 나는 그랬다. 되도록이면 쓸쓸한 풍경을 사진에 박으라고. 쓸쓸하고 쓸쓸해서 하냥 쓸쓸한 것. 그리고 사뭇 거창하게 덧붙였다.

“무릇, 모든 문학작품은 말야, 아니 모든 예술은 거기 슬픔이 있어야 한다구. 슬프지 않은 사람의 작품은 예술이 아냐. 명실상부하게 슬픈 사람이 명실상부하게 슬픈 작품을 탄생시키고 그런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지.”
내가 그렇게 말할 때 박여선은 허술한 이정표 때문에 길을 못 찾고 힘들어했다. 박여선의 고충과는 아랑곳없이 나의 쓸쓸함을 찾는 여정은 오대산 월정사까지 이어졌다.

늦가을 고적한 산사를 머릿속에 그리며 왔건만, 월정사 앞마당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도대체 쓸쓸할 수가 없다. 쓸쓸한 것도 조건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가능한 것 아닌가. 국도변의 억새꽃이 쓸쓸하다 했지만, 기실 자동차 소음과 매연 때문에 그 억새들, 제대로 쓸쓸할 수도 없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조건이 맞으면 우아하게 쓸쓸함을 만끽할 수 있지만 이도저도 안 되면 억새꽃 처참해지는 것, 한 사람 궁상맞아지는 것, 시간문제 아닌가. 이왕 내친 길 월정사에서도 한참 위로 올라간 관음암에 당도하고서야, 이곳이야말로 제대로 쓸쓸한 곳이구나, 제대로 쓸쓸한 것 해볼 수 있는 곳이구나, 싶어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주지스님한테 차 한 잔을 청해 마셨다.

차는 향기롭고 바람소리는 청량하고 스님은 참으로 그윽하시건만, 세간에서 올라온 중생의 업장이 생각보다 두터워서인가. 그 와중에도 내 세 치 혀를 넘어온 저자의 언어들이 청량한 관음암의 공기를 흐트리고 있으니.





등짐 진 할머니, 국도변의 순교자


나는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아무래도 저자의 인간은 저잣거리에 내려와야 할 것만 같았다. 마침 오늘이 평창장이라고 했다. 어제 사람이 텅 비었던 평창 차부에는 오늘 장 보러 나온 골기리 사람, 신리 사람들로 북적인다. 고요한 오대산 암자에서 북적이는 평창 저자까지의 거리가 바로 출세간과 세간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산에서 시장으로 오는 길 어름에서 감자포대를 등에 멘 할머니를 만났다. 이름을 물으니 이름 알아서 뭐 할 거냐고 되묻는다. 할머니는 어두워 오는 국도변을,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는 11월, 강원도의 국도변을 감자포대 등에 지고 묵묵히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순교자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그 국도변에서 또 이 노인을 만났다. 요강과 지팡이와 털신이 이 노인의 오두막 앞에 가지런하다. 손바닥만한 마당의 빨랫줄에 바지 한 벌, 양말 한 켤레가 단출하다. 말하자면 감자포대를 등에 메고 국도변을 묵묵히 걸어가는 할머니와 이 노인과 이 노인의 집 토방에 놓인 요강, 지팡이, 털신, 빨랫줄에 걸린 바지 한 벌과 양말 한 켤레가 쓸쓸함이다. 쓸쓸함이 뭔지도 모르고 그것들은, 그 노인들은 쓸쓸하다. 더도 덜도 없이 쓸쓸함이다. 명실상부하게 쓸쓸함이다. 내 쓸쓸함이, 오대산 암자에까지 올라가서 찾아 헤맨 내 알량한 쓸쓸함이라는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평창장, 어물전 뒤에서 털썩 주저앉은 노인 한 분이 청아하게 노래 부른다. 풍각쟁이 김 노인이다.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칠포산 검은 구름이 왕래를 허는고나 원앙금침 잣베개는 저녁마동 비고 요 내 인생 뭘로 생겨 정든 임이 없나….’
평창 방림에 사는 김 노인인데, 어물전 양 노인한테 된구박을 당하고도 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모르고 눈구름 몰려오는 하늘에 대고 혼자서 노래 부른다. 평창 차부 연탄난로가 오늘은 따뜻하다.





찜질방에 뉘인 마흔의 몸


진부 ‘비사난야(非寺蘭若)’에 머무르고 있는 김성동 선생을 찾았다.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절 아닌 절이라고 했다. 내 이 허망한 여정의 내력을 듣고 나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노란 곡차를 내준다. 선생의 거처, 찢어진 바람막이 비닐들이 맹렬하게 펄럭인다. 생각해 보니 선생도 한평생을 세간과 출세간의 어름에서 서성이는 분이 아닌가. 선생의 거처 또한 쓸쓸하고 또 쓸쓸하여, 내 가당찮을 쓸쓸함 따위 만주벌판을 방불케 하는 진부 상월오개리 밭언덕 너머로 가뭇없이 사라져야 할 것임을, 사라지고 있음을 나는 알았다.

진부 청년 김도연 군을 만나, 평창식 칼국수로 저녁을 먹고 나는 이제 내 가당찮을 쓸쓸한 여정과도 그만 작별을 고하고서 내 사는 춘천으로 갈 버스를 타려고 진부 차부로 뛰었다. 내가 차부로 뛰어드는 순간과 춘천행 빨간 강원여객이 진부 차부를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결국 춘천 가는 막차를 놓치고 만 것이다. 낭패였다.

평창장 풍각쟁이 노인은 노래 불렀었다. 예수나 믿으면 천당이나 가는데 이웃색시 믿었다가 일신 낭패되었다고. 스톱을 세 번이나 외쳤으니 강원여객 기사 아저씨가 날 기다려 주겠지 했지만 차표를 사서 나가 보니 차는 떠나고 없다. 무정하고 무정한 것은 강원여객 아저씨였다.

나중이야 어떻게 될 값에 조금이라도 춘천 가까운 데까지만이라도 일단 가보자 하구서 원주 가는 막차를 탔다. 원주터미널에 내렸다. 터미널 매표소 아가씨들이 퇴근 중이었다. 나한테 저 아가씨들이 춘천 가는 차표를 끊어줘야 하는데, 차표가 없으면 집에도 못 가는데 하고서 차표를 끊어주라고 사정했더니 아가씨 왈, “내일 차표는 내일 와서 끊으세요.”

막막하여 원주 터미널 앞 전화부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건장한 남자 두 사람이 내게 접근한다, 겁이 팍 난다. 그들이 내 행선지를 물었다. 춘천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춘천 8만 원, 합승 5만 원. 무슨 주문처럼 뇌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무섭다. 수첩을 아무리 뒤져도 도대체 내가 전화를 걸 만한 사람이 없다. 비사난야 김 선생식의 어법을 따르자면 어디에 내 ‘조직원’ 하나가 없다. 마지막이다 싶어 후배한테 전화를 걸어서 하소연 겸 대책을 물으니, “떠나려거든 스물에 떠나야지 마흔에 길을 떠났으니 힘들고 쓸쓸하지요, 뭐 별거 있습니까, 찜질방에나 들어가 보세요.”

늦은 밤 원주, ‘황금 24시 찜질방’에 나는 내 마흔 살 고단한 몸을 부렸다.

글, 공선옥
사진, 박여선




[인터뷰] <마흔에 길을 나서다>를 묶어낸 소설가 공선옥

홍성식 기자    






모든 것은 80년 광주에서 시작됐고, 동시에 끝났다


지독하게도 가난했다. 아버지는 아내와 세 딸의 '밥'을 위해 평생을 떠돌이 막일꾼으로 세상을 헤매 다녔다. 일거리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전라도 목포건, 경상도 부산이건, 충청도 어느 도시건 상관하지 않고 헐값에 자신의 노동을 팔았다.

너나 없이 가난했던 1960년대. 가진 거라곤 몸밖에 없는 사람들의 사정은 누구나 비슷했다. 그 아버지는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에 등장하는, 싸구려 식당에서 멀건 국에 식은 밥을 말아 삼키고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사는 영달과 정씨에 다름 아니었다. 매일 같이 일하면서도 언제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역설의 삶.

아버지가 벌어다주는 돈으론 짜디짠 자반고등어 한 마리 구워먹을 형편이 안됐기에 딸들은 그 동네 계집아이들이 통상 그런 것처럼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면 식모나 여공이 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극한의 가난 속에서 갯가의 지렁이를 캐내다 멀건 죽을 쑤어 먹여 키운 딸들은 기특하게도 공부를 잘 했다.

중학교 졸업 후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가려던 그 아버지의 둘째 딸. 하지만, 선생 하나가 극구 말렸다. "여기서 주저앉히기엔 가진 재주가 아깝다"는 이유에서였다. 선생의 설득과 도움으로 입학한 고등학교. 열 일곱 소녀는 고향인 전남 곡성을 떠나 광주를 향했다.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 못한 유학이었다.

하지만, 풀을 먹여 빳빳이 다린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재잘거리던 광주에서의 행복은 너무도 짧았다. 소녀는 1980년 5월 광주의 학살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따뜻한 늦봄 햇살이 눈부셨던 그날.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공수부대의 곤봉에 맞고 대검에 찔려 쓰러지던 사람들. 비명은 대로를 맴돌았고, 피는 아스팔트 위로 강을 이루었다.

장님이 아니면 볼 수밖에 도리 없던 학살의 현장. 도시 곳곳에선 콩볶듯 연일 총소리가 들려왔고, 제 또래 여고생이 헌혈을 하고 나오다 진압군의 조준사격에 머리통이 날아갔다는 이야기가 흉흉한 소문이 되어 떠돌았다. '80년 광주'는 열 여덟 어린 여고생을 견딜 수 없는 공황에 빠뜨렸다. 정신과 육체는 동시에 황무지가 됐다. 그리고, 소녀의 기억은 거기에서 끊겨있다.

이게 누구의 이야기냐고? 소설가 공선옥(40)의 청소년기의 이야기다. 그는 말한다. "아직도 그날 내가 본 것이 현실이었는지 의심스럽다"고. "분명 죽는 사람을 봤는데 죽인 사람은 왜 없냐고"고.

23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열 여덟 철없던 여고생은 아이 셋을 둔 아줌마가 됐지만 광주는 여전히 공선옥에게 선지피를 흘리는 지울 수 없는 상처다.


"선반공이 쇠를 깎고,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듯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노동자"


  82년 대학에 입학한 공선옥. 하지만, 공부만 열심히 하는 건 당시 광주의 학생들에게 수치인 동시에 사치였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읊조리던 시절. 매일매일이 집회였고, 하루하루가 싸움의 연속이었다. 화염병을 만들고, 깨진 보도블록을 시위대에게 날랐다.

가세는 더 기울었고, 학교도 중도에 그만 뒀다. 공장 노동자와 관광버스 안내양으로 살았던 20대 중반. 하지만, 그 시절을 추억하는 공선옥의 목소리는 의외로 밝았다.

"시골 중년부부들에게 온천으로의 관광은 하나의 축제였어. 돼지를 잡고, 버스에 술을 박스 채 실었지. 남자들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여자들은 고운 빛깔의 한복을 차려입고... 안내양 노래교본에 나와있는 곡들을 흥얼거리면 너나 없이 좁은 차 복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왜 그리 우습고도 가슴 짠하던지."

스물 네 살에는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 결혼은 행복하지도 오래 가지도 못했다. 이혼에 이어진 또 한번의 결혼. 하지만 재혼생활 역시 오래지 않아 파경을 맞았다. 바람대로 돼주지 않았던 2번의 결혼. 그리고 남겨진 3명의 아이들. 묘하게도 공선옥과 함께 살았던 두 사내는 모두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활동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왜 소설가가 됐느냐"는 질문에 공선옥은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라고 답했다. 정말 그럴까? 채 서른이 되기 전에 그토록 많은 사연을 겪었으니, 어쩌면 그 사연들이 기구한 팔자의 한 여인을 이야기꾼에 다름 아닌 소설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규정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91년 등단작 '씨앗불'에서부터 첫 작품집 <피어라 수선화>를 거쳐 올해 초 출간된 <붉은 포대기>까지 공선옥이 낸 10여권의 책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5월 광주'와 '억압받는 여성'이라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공선옥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읽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지 평론가나 기자들이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잖아. 나 역시 그런 강박관념에서 쓴 것도 아니고. 소설이 거창한 철학이나 이념을 담아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가 질려. 소설은 그저 세상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쓰는 것 아냐?

선반공이 쇠를 깎고,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고, 제과공이 빵을 굽듯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노동자일 뿐이야. 거기에 무슨 철학이나 이념이 필요하고, 의미심장한 뜻을 담아내는 게 중요하겠어. 내 소설쓰기는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작가는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정말로 밥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공선옥의 소설에선 그의 아버지와 자신, 자기의 자식에 다름 아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끈끈한 연민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가없는 애정이 뭉턱뭉턱 묻어 나온다. 이는 모진 세상을 억척같이 살아본 이가 아니면 생산해낼 수 없는 언어.

공선옥이 춘천으로 온 이유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 본 '전세값에 제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플래카드를 본 때문이었다. 주저 없이 아이 셋을 데리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로 떠날 수 있는 용기. 거기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이를 두고 공선옥은 "닥치면 다 살아내게 돼있다"라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기자는 그 무덤덤함이 무서웠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제 삶과 자기에게 몸을 기댄 아이들까지 부둥켜안으며 거친 세파를 헤쳐나갈 용기 있는 사람이 쓴 소설이라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진정한 용기'를 말할 수 있을 터. 공선옥에게 세상은 여자라고 봐주지 않은 피비린내 풍기는 싸움터고, 소설은 그 싸움터에서 도태하지 않으려 힘주어 잡은 무기가 아닐지.

막내아들에 대한 사랑... 작지만 단단한 어깨

최근 출간된 공선옥의 기행산문집 <마흔에 길을 나서다>는 관광지와 교통편, 맛집만을 소개하는 식상한 여행안내서와는 전혀 다른 생경함으로 월간 <말>에 연재될 때부터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꼬박 1년을 '집'이 아닌 '길'에서 살았다. 그 길 위에서 보따리를 머리에 인 행상 할머니를 만났고, 분신한 노동자를 만났으며, 미군탱크에 깔려죽은 중학생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또 무엇을 만났을까?

친절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누가 가장 기억에 남고, 어떤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가"라고 내처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은 걸작이다.

"모두 다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길을 떠나있는 동안 새끼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먹이를 준비했던 기억은 더 잊혀지지 않는다."

구구절절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부연에 부연을 거듭하는 세태에 '책 내용은 책을 읽어보면 알 것이지 무슨 말이 필요한가'라고 소리 없이 웅변하는 그의 당당함 앞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니,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그때. 고등학교에 다니는 누나가 돌봐주고 있는데도 "엄마가 보고싶다"며 훌쩍이는 일곱 살 막내아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어리광을 자르며 "무언가를 하러 나왔으면 그걸 다 해야 집에 갈 수 있는 거다. 너도 그걸 알아야한다"라고 말하는 공선옥의 태도가 단호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들 몫으로 따로 챙겨둔 왕만두를 취중임에도 잊지 않았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을 만두를 검은색 비닐봉투에 담아 든 공선옥이 서둘러 작별인사를 고했다. 돌아선 그녀의 작고 좁은 어깨가 쇠를 달궈 곡괭이와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의 그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 단단함으로 써낸 소설들이 그와 아이들을 먹이는 수단인 동시에 '보다 아름다운 세상의 건설'이라는 소설의 궁극적 목적에까지 가 닿을 수 있다면 '소설 쓰는 노동자' 공선옥과 놀았던 그 하루가 기자에게도 무의미하지만은 않으리라.


"그냥 닭갈비에 소주나 한 잔 하고 가세요"  
[취재후기] 술집에서 토해낸 고단한 인생사  


애초 공선옥과의 인터뷰는 최근 출간된 기행산문집 <마흔에 길을 나서다>에 관해 몇 가지를 묻고, 작가에겐 생면부지의 땅인 강원도 춘천에서 뭘 하고 어떻게 사느냐를 들어 가벼운 읽을거리를 만들 요량으로 준비됐다.

서울발 춘천행 무궁화호 기차에 몸을 실었던 8일. 하늘 가득 널브러진 7월의 햇살은 평화로웠고, 청평과 강촌에서 만난 물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시원스러웠다. 하지만, 이 시원스런 평화는 공선옥과 그의 세 아이가 사는 아파트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깨졌다.

한 두 시간 준비해 간 질문을 토대로 인터뷰를 하고, 나머지 저녁시간은 지인을 만나 산천어회에 국화주나 마시려던 기자의 계획은 "집이 시끄러우니 어디 근처에 가서 닭갈비에 소주라도 한잔하며 이야기하자"는 공선옥의 뜬끔없는 제의 탓에 초반에 무산됐다.

어디 그뿐인가. 취재수첩과 여기저기서 찾아낸 작가의 관련자료를 꺼내 정식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순간 "춘천까지 와서 일은 무슨 일을 해요? 그냥 재미있게 놀다가요"라는 공선옥의 업무방해성 멘트는 한번 더 기자의 무장해제를 요청하고 있었다.

가져간 수첩과 자료를 가방에서 꺼내지도 못한 채 공선옥과 기자는 급하게 소주잔을 돌리며 놀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시작한 그 놀이는 자정이 가깝도록 계속됐다. 소박하게 둘이서 시작한 술자리는 지역방송국 기자와 사진작가, 춘천마임축제 사무국장까지 어울린 큰판으로 발전했고, 안주는 닭갈비에서 잘 삭힌 전라도식 홍어회로, 다시 멸치와 땅콩으로 변했다.

장소를 바꿔가며 3차까지 이어진 술자리. 공선옥은 예닐곱 살 아래인 기자에게 반말로 "야, 제발 정색하고 질문 좀 하지 마라. 네가 무슨 취조하는 검사냐"라는 가벼운 주정까지 해가며 흥취한 채 술자리를 주도했다. 멀리서 춘천발 서울행 마지막 열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취기가 가져다준 환청이었을까? / 홍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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